벨라 타르 감독의 마지막 장편영화, 《토리노의 말(The Turin Horse, 2011)》은 영화 역사상 가장 정적인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이 작품은 철학적 침묵, 반복되는 일상, 그리고 점차 소멸하는 존재를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응시한다. 니체가 쓰러졌다는 토리노의 사건을 모티프로 삼아 시작되는 영화는, 말과 인간, 자연과 고립, 시간과 운명을 조용히 침식시키는 거대한 허무의 서사로 전개된다. 본 리뷰에서는 이 작품이 드러내는 고독, 반복, 무의미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인간 존재와 세계의 파국을 조명해본다.
고독 – 침묵 속 존재의 무게
《토리노의 말》은 단 두 인물, 아버지와 딸을 중심으로 한다. 이들은 외딴 시골의 낡은 집에서 살아가며, 거의 말을 하지 않는다. 영화는 대사보다는 장면과 리듬, 그리고 그 무거운 공기 속에서 고독을 말한다. 고독은 이 작품의 핵심 정조이자, 철학적 배경이다. 그리고 벨라 타르는 그것을 ‘정지된 시간’ 안에서 형상화한다. 영화는 단 하나의 사건 없이도 압도적인 정서를 자아낸다. 이는 고독을 감정적으로 다루지 않고, 구조적으로 설계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누구도 만나지 않으며, 바람이 불고 말은 멈추며, 삶의 조건이 하나씩 무너져간다. 하지만 인물들은 저항하지 않는다. 침묵 속에 수용하고, 고개를 돌리지 않으며, 오직 생존에만 집중한다. 고독은 여기서 단순한 감정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조건이며, 세계가 인간을 포기하는 방식이다. 카메라는 인물의 얼굴을 거의 정면으로 잡지 않고, 뒤에서 따라간다. 이는 관객에게 고독한 존재를 쫓게 만들며, 동일화보다는 거리감을 조성한다. 마치 세계와 인간이 서로 외면하는 구조를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외부와의 접촉도 거의 없다. 몇몇 장면에서 등장하는 손님들조차 절망과 허무, 파국적인 철학을 늘어놓는다. 그들은 해결책을 말하지 않는다. 벨라 타르는 인물들에게 희망이라는 개념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이 영화의 고독이 감정적 낭만이 아니라, 존재론적 파열임을 드러내는 지점이다. 고독은 이 작품에서 한 사람의 상태를 넘어, 세계 자체의 침묵을 드러낸다. 자연은 무력화되고, 문명은 부재하며, 모든 소리는 무거운 바람소리로 덮인다. 인간은 대지 위에서 더 이상 신의 형상이 아니며, 단지 생존을 반복하는 육체로 퇴화한 존재일 뿐이다. 벨라 타르는 그러한 인간의 처지를 ‘고독’이라는 정서로 시각화하고, 그것을 거부하지 않고 직면하게 만든다.
반복 – 시간은 앞으로 흐르지 않는다
《토리노의 말》의 가장 두드러진 형식적 특징은 반복의 리듬이다. 하루는 거의 동일한 구조로 반복되며, 등장인물들은 매일 같은 행위를 반복한다. 감자는 삶아지고, 물은 길어오며, 창문은 막히고, 옷은 갈아입혀진다. 이 반복은 극적인 전개를 거부하며, 사건 없는 서사를 통해 ‘삶’이라는 형식 자체를 보여준다. 반복은 여기서 삶의 자동화된 시스템이 아니라, 점진적 붕괴의 전조로 기능한다. 매일같이 동일한 일이 일어나지만, 세부 요소는 하나씩 무너진다. 말이 먹기를 거부하고, 우물이 마르고, 바람은 강해지고, 마지막엔 불마저 꺼진다. 반복은 변화를 허용하지 않는 구조 같지만, 실은 세계의 균열이 느리게 확산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반복 구조는 마치 고대 연극이나 의식의 반복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삶은 이야기나 의미의 연속이 아니라, 단순한 생존의 매커니즘일 뿐이다. 벨라 타르는 이 과정을 통해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의 주관적 흐름이 아닌, 물리적 존재로서의 시간을 체감하게 만든다. 시간은 흐르지 않고, 무게처럼 누적된다. 이러한 반복은 현대인의 삶과도 연결된다. 하루하루 동일한 구조 속에서, 점차 기능을 잃어가는 우리의 일상은 얼마나 허무한가? 영화는 그것을 극적으로 그리지 않으면서도, 철저히 육체적 체험으로 환기시킨다. 감자를 먹는 장면의 길이, 옷을 갈아입히는 동작의 디테일, 매일 닫히는 창문의 무게감은 관객에게 시간의 정지와 반복이 주는 피로와 무력감을 극한까지 전달한다. 결국 반복은 이 영화에서 운명 그 자체를 의미한다. 아무리 애써도 변화는 없고, 희망은 사라지고, 신은 응답하지 않는다. 반복은 인간을 시험하는 도구가 아니라, 무의미 속에서 존재를 드러내는 거울이다. 관객은 이 무의미한 반복 속에서 오히려 삶의 실체를 본다. 그것은 견디는 것, 소멸을 향해 가는 것, 그리고 그럼에도 버티는 것이다.
무의미 – 사라지는 빛과 언어
《토리노의 말》은 이야기의 끝에서조차 뚜렷한 결론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는 점점 어두워지고, 침묵은 짙어지며, 무의미의 공간으로 이동한다. 언어는 사라지고, 행동은 멈추며, 마지막에는 불조차 꺼진다. 벨라 타르는 의미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무의미 자체의 무게를 관객에게 전달한다. 이 영화의 공간은 폐쇄되어 있고, 외부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은 멈추었고, 인간은 그 말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딸은 감자를 먹고, 물을 길어오지만 그 행위는 어떤 목적이나 의미로 귀결되지 않는다. 단지 수행된다. 그리고 이 수행이 더 이상 지속되지 못할 때, 그들은 어둠 속에 묻힌다. 무의미는 여기서 절망이 아니라, 존재의 본질이다. 벨라 타르는 세계가 우리에게 말을 걸지 않을 때,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신이 죽은 시대에, 인간은 의지를 갖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무의미 속에서 겨우 버티는 존재다. 이 영화에서 종교적 상징은 부재하지만, 그 부재 자체가 역설적으로 깊은 철학적 물음을 던진다. 사운드마저 영화 후반에 이르면 거의 사라진다. 초반의 바람소리와 음악도 약화되며, 마지막엔 암흑만이 남는다. 이는 단순한 시각적 암전이 아니라, 존재가 점차 세계에서 사라져가는 과정이다. 벨라 타르는 인간이 의미를 만들 수 없는 순간이 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 무의미의 끝을 직면시킨다. 또한, 마지막 장면에서의 불 꺼진 집은 인간이 쌓아온 문명의 무력함을 상징한다. 불, 언어, 고기, 물—all 소멸한 뒤 남은 건 어둠뿐이다. 이 장면은 ‘무언가를 할 수 있음’이라는 믿음 자체를 포기하게 만든다. 이는 정치적 메시지가 아니라, 존재론적 질문이다. 우리가 의미를 붙잡지 못할 때, 과연 무엇으로 살아갈 것인가?
《토리노의 말》은 말 그대로 종말의 영화다. 그러나 그것은 폭력적이거나 비극적인 종말이 아니라, 고요하고 느린 종말이다. 벨라 타르는 고독한 인간의 모습을 반복을 통해 응시하며, 점진적으로 무의미 속에 침몰시킨다. 영화는 침묵 속에 존재를, 반복 속에 파국을, 어둠 속에 철학을 담아낸다. 모든 것이 정지된 이 세계에서, 우리는 묻는다. "당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