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나리’는 한국계 미국인 감독 리 아이작 정(정이삭)의 자전적 경험을 바탕으로, 1980년대 미국 남부로 이주한 한인 가족의 삶을 섬세하게 그려낸 영화다. 이민, 가족, 생존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미국 땅에서 뿌리내리려는 가족의 고군분투는 단지 한 가족의 이야기를 넘어서 보편적 삶의 의미와 회복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이민 – 낯선 땅에서 뿌리내리기 위한 몸부림
‘미나리’의 시작은 미국 아칸소 시골로 이주한 한 가족의 풍경으로 열린다. 농장을 꿈꾸는 아버지 제이콥과 안정된 삶을 바라는 어머니 모니카, 그리고 두 아이 데이빗과 앤. 이들은 낯선 땅에서 미국식 성공을 꿈꾸며 농장을 시작하지만, 언어, 문화, 경제적 어려움 등 이민자에게 가해지는 복합적인 장애에 부딪히게 된다. 제이콥은 한인 사회와 멀리 떨어진 외진 지역에서 자신만의 꿈을 이루고자 한다. 그는 닭 성별을 감별하는 단순 노동을 그만두고, “한국 채소를 미국에 팔겠다”는 비전을 세우며 직접 농지를 일군다. 하지만 이민자의 현실은 이상만큼 낭만적이지 않다. 농장용수 문제, 시장 개척의 한계, 그리고 끊이지 않는 가족 간 갈등은 그들의 삶을 끊임없이 시험한다. 영화는 미국이 ‘기회의 땅’이라는 인식을 해체한다. 현실은 자본, 정보, 네트워크 모두 부족한 이민자에게 가혹하다. 특히 언어가 통하지 않고, 사회적 지지망도 부재한 시골에서 그들의 도전은 고립에 가깝다. 그러나 이들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제이콥은 실패를 거듭하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모니카는 불안한 환경 속에서도 가정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버틴다. 이민은 단지 국경을 넘는 행위가 아니다. 그것은 자기 정체성의 해체이자, 새로운 뿌리를 내리기 위한 생존의 여정이다. ‘미나리’는 이 과정을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낯설고 불안정한 현실을 담담하게 보여주며, 진짜 이민자의 삶이란 “하루하루 버텨내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한다.
가족 – 서로의 짐이 아닌 뿌리가 되어가는 과정
‘미나리’에서 중심이 되는 또 하나의 축은 가족이다. 제이콥과 모니카는 부부로서, 또 부모로서 서로 다른 가치와 현실을 바라보며 갈등한다. 제이콥은 자신이 가족을 위해 ‘위험을 감수하고 도전하고 있다’고 믿지만, 모니카는 안정된 직장과 교육 환경이 가족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한다. 이 차이는 두 사람의 대립으로 이어지며, 가족의 해체 위기를 불러온다. 하지만 ‘미나리’는 갈등 속에서도 가족이란 무엇인지, 서로에게 어떤 존재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질문을 던진다.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해 가던 부부는 위기의 순간, 결국 함께 불타는 헛간 앞에서 손을 맞잡고 새로운 출발을 결심한다. 이는 가족이란 서로의 짐이 아닌, 뿌리가 되어주는 존재임을 상징한다. 또한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 중 하나는 한국에서 건너온 외할머니 순자다. 순자는 손자 데이빗과 문화적·세대적 간극을 극복하며 진정한 유대를 만들어간다. 처음엔 순자를 이상한 사람이라고 경계하던 데이빗은, 그녀와 함께 미나리를 심고, 산책하며 점차 ‘가족의 진짜 의미’를 배워간다. 순자는 낯선 땅에서 유일하게 뿌리를 내리는 존재로,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란다”는 대사처럼, 가장 한국적인 존재가 가장 미국적인 땅에서 살아남는 상징이 된다. ‘미나리’는 가족을 “같은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집단”이 아닌, “서로 다르지만 그럼에도 함께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정의한다. 이는 기존 가족주의적 서사에서 벗어나, 더욱 현실적인 가족의 형태와 기능을 보여주는 새로운 가족영화로서의 가치를 가진다.
생존 – 불확실한 세계에서 버티고 살아남기
‘미나리’는 영화 속 어디에도 “이겨내자” “꿈을 이루자” 같은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대신 이 영화는 “버티자” “살아남자”는 메시지를 조용히 반복한다. 이민이라는 거대한 환경 변화와 경제적 불안, 정체성 혼란, 가족 갈등 등 모든 요소가 이 가족을 위협하는 가운데, 생존은 그저 숨 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대한 일이 된다. 가장 극적인 순간은 병약한 데이빗이 심장질환을 안고도 순자와 함께 야외에서 미나리를 가꾸는 장면이다. 이는 생명력이 약한 두 존재가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모습을 통해, 생존이란 약한 존재들끼리 연결될 때 가능한 것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영화 후반부, 순자가 저지른 실수로 헛간이 불에 타는 장면은 상징적 파괴이자 재생의 시작이다. 미나리는 그 모든 잿더미 속에서도 살아남는다. 뿌리를 깊이 내리고,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자라는 미나리는, 이민자 가족이 겪는 수많은 실패와 상처 속에서도 끝끝내 포기하지 않고 살아가는 그들의 삶을 닮았다. 특히, 한국에서는 흔하고 별 것 아닌 식물이 미국의 땅에서도 뿌리내리는 과정을 통해, ‘생존’의 조건이 결코 강함이 아니라 ‘끈질김’과 ‘유연함’임을 보여준다. 이처럼 ‘미나리’는 성공이 아닌 생존을 이야기한다. 세상이 요구하는 정답이나 스펙을 채우는 것이 아닌, 그저 ‘자기 자리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것’이 얼마나 값진 일인지를 담담하게 말한다. 이는 요즘처럼 불확실성과 불안이 일상이 된 시대에, 많은 이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주는 이유다.
‘미나리’는 특정 민족이나 이민자의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삶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낯선 곳에서 뿌리내리기 위한 몸부림, 갈등 속에서도 함께 살아가는 가족, 그리고 끝까지 버텨내는 생존의 감각. 이 모든 요소가 어우러진 이 영화는 삶을 조용히 응시하는 방식으로 깊은 울림을 남긴다. 결국 우리는 모두 어디선가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다. 그 방식이 거창하지 않아도,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지 않아도 괜찮다. 미나리처럼 낮게 퍼지고, 끈질기게 자라며, 언젠가 꼭 필요한 자리에 힘이 되는 존재. ‘미나리’는 그런 삶을 응원하는 영화다.